창세기 1장 묵상, 원어 분석과 강해
창세기 1장 강해
창세기 1:1-2 창조의 시작
하나님께서 창조하십니다. 1절은 모든 시작이 하나님이심을 말합니다. 태초에의 베레쉬트는 처음이란 뜻으로 먼저 시작 등을 의미합니다. 천지는 하샤마임과 하에레츠로 그 하늘들과 그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은 복수 형태로만 사용합니다. 바울의 세 번째 하늘이란 표현도 이러한 유대적 개념의 표현으로 보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2, 개역개정)
"태초에"라는 말로 성경의 첫 구절은 시간과 존재의 기원을 열어젖힙니다. 히브리어 ‘베레쉬트’(בְּרֵאשִׁית)는 문자적으로 "시작 가운데"라는 뜻을 지니며, ‘시작’은 단순히 시간의 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간 자체를 창조하셨음을 전제합니다. 인간의 시간 개념은 순환이나 무한 직선이 아닌, 하나님 안에서 비롯된 목적 있는 선형 시간입니다. 이 ‘태초’는 곧 우주와 역사, 시간과 존재의 ‘근본 질서’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엘로힘, אֱלֹהִים)은 복수형의 형태로 사용되지만 단수 동사와 함께 등장하여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표현합니다. 이 독특한 문법은 삼위일체적 함의를 내포할 가능성도 있으며, 초기 교부들(특히 터툴리안과 아타나시우스)은 본 구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일치를 추론하기도 했습니다. 창조라는 동사 ‘바라’(בָּרָא)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어가 될 수 있는 동사로, 무(無)로부터 존재를 일으키는 절대적 창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창조적이라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만드는'(make) 존재이지, '창조하는'(create) 존재는 아님을 명확히 합니다.
이어지는 2절에서 우리는 창조의 무대인 ‘땅’의 초기 상태를 접하게 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는, 창조가 무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혼돈을 질서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역동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혼돈하고 공허하며’는 히브리어로 ‘토후 바보후’(תֹּהוּ וָבֹהוּ)로, "형태 없음과 공허함"을 시적으로 반복하는 구조입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45:18에서도 등장하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음을 선언함으로써, 창조는 질서로 향한 의지임을 밝힙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의 ‘깊음’은 히브리어 ‘테홈’(תְּהוֹם)으로, 고대 근동 문화에서는 종종 혼돈의 바다, 혹은 미지의 혼돈 세력으로 인식되었던 단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혼돈의 깊음조차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은 고대 바빌론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와 의도적으로 대조를 이루며, 성경의 하나님은 그 어떤 대적과 싸워 이겨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오직 말씀으로 모든 것을 조화롭게 지으신 전능자임을 밝힙니다.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여기서 ‘운행하다’는 히브리어 ‘라하페트’(רָחַף)는 ‘부드럽게 진동하다’, ‘새가 날개로 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신명기 32:11의 독수리가 새끼를 어루만지듯 보호하는 이미지와 연결되며, 하나님의 영(רוּחַ אֱלֹהִים, 루아흐 엘로힘)이 질서 없는 공간 위를 부드럽고 능동적으로 감싸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성령 하나님의 창조적 에너지가 그 어둠과 무질서 위를 감싸 안으시며 생명의 서막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기원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존재의 기원, 인생의 혼돈, 세계의 질서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묻는 신학적 선언이며,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삶이 혼돈과 흑암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은 여전히 그 위를 운행하고 계시며, 무(無)에서도 새 창조를 이루어내십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 본문에 대해 "하나님은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무질서 위에 임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감지하기 전에도 그 깊은 곳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 신학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첫째, 하나님은 질서의 창조주이시다. 둘째, 모든 무(無)의 상태는 하나님의 임재를 담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셋째, 하나님의 영은 혼돈을 품고 생명의 기초를 마련하신다. 이는 개인의 삶, 교회의 시작, 세계사의 흐름 어디에든 적용될 수 있는 근원적 진리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의 시작을 ‘계획’에서 찾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임재’에서 시작합니다. 혼돈 속에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 지금도 우리의 삶 위를 운행하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영이 말씀하실 때,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3-5 첫째 날의 창조
첫째 날은 빛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창조로 이어집니다. 있으라 하시면 있습니다. 빛의 창조는 어둠의 창조와도 같습니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 없습니다. 빛의 창조로 어둠이 생기고, 그로 인해 빛과 어둠이 나뉘게 됩니다. 이제 빛과 어둠은 영적 상징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창조된 피조물에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부르심은 곧 존재의 방식이 만들어집니다. 작명은 미신이 아니라 철저한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을 부르심으로 존재를 소생시킵니다. 마태를 부르심으로 그를 사도로 삼으신 것처럼 존재에 이름을 붙으실 때 그것은 사명이 됩니다.
창세기 1:3-5 묵상 | 첫째 날의 창조, 어둠 속에 임한 빛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3–5, 개역개정)
창조 기사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있으라”(יְהִי אוֹר, yehî 'ôr)입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단 두 단어로 되어 있으나, 놀라운 창조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있으라’(yehî)는 존재를 불러일으키는 명령형이며, ‘빛’('ôr)은 물리적 빛을 넘어서 생명, 진리, 질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이 명령은 창조의 원천이 인간의 수고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dabar, דָּבָר)이라는 점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곧 “빛이 있었고”(וַיְהִי אוֹר, vayehî 'ôr)라는 대구적 구조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의도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형성하는 능동적 실재임을 드러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3절은 이 창조의 말씀을 곧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고 선언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이 구절을 두고 “모든 피조물은 말씀을 통해 존재하며,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이자 질서의 근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빛은 아직 해와 달이 창조되기 이전의 빛으로, 천체가 아닌 하나님의 창조 질서의 첫 표현이자 근본적 에너지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이 빛을 ‘형상 없는 순수한 광휘’로 해석했으며, 기독교 전통에서는 종종 성령의 활동과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연결되어 신학적으로 풍성하게 해석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은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하나님은 이 빛을 “좋았더라”(טוֹב, tov) 하셨습니다. 여기서 ‘tov’는 단순한 기능적 평가를 넘어, 창조 세계가 하나님의 성품과 목적에 부합함을 뜻합니다. 선하고 아름다우며 질서정연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드러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단지 유용함(utilitas)을 넘어 미(美)와 선(善)의 통합된 표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질서 속에서도 미를 추구하시는 창조적 미학자(Creator Aesthetician)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사” 구별하십니다. 여기서 ‘나누다’(בָּדַל, badal)는 히브리어에서 거룩함(קדש, qadosh)과 관련된 행위로 자주 쓰입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단순한 배치가 아니라 구별과 질서, 거룩의 구조화입니다. 창조의 본질은 무질서에서의 질서화이며, 이는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 사역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낮(יוֹם, yôm)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לַיְלָה, laylah)이라 부르셨습니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구약 세계관에서 주권과 통치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물 위에 이름을 부여하심으로써 그 위에 권세를 가지시며, 인간은 이후 2장에서 하나님을 닮아 피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대리자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는 표현은 히브리 문학 특유의 시간 개념을 보여줍니다. 유대인의 하루가 저녁부터 시작되는 전통은 바로 이 구절에 기초하며, 이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창조의 방향성을 드러냅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구속 질서가 ‘첫째 날’부터 설정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 삶에 주는 묵상의 초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혼돈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새로운 질서와 생명이 탄생함을 믿을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구별하시고 이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우리 존재도 무명의 혼돈 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어 안에서 불리며 구속된 이름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창조는 어둠 속에서부터 시작되어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 삶에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끝이 아니라 ‘첫째 날’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그 위에 말씀이 임하면, ‘빛이 있으라’는 창조의 새벽이 반드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6-8 둘째 날의 창조
둘째 날은 공간을 만드십니다. 엄밀하게 둘째 날은 무엇을 새롭게 만들지 않고 있은 것을 분리함으로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물을 하늘로 높이 올리시고 약간의 물은 아래에 두심으로 두 물 사이에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그 공간을 궁창이라 부르십니다.
창세기 1:6–8 묵상 | 둘째 날의 창조, 물 위에 펼쳐진 궁창의 신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세기 1:6–8, 개역개정)
둘째 날의 창조는 ‘궁창’이라는 다소 낯선 개념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וַיֹּאמֶר, vayyōmer)—말씀하시니—하늘이 나타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원천이며 명령이며 실행력입니다. 이 날은 첫째 날처럼 빛을 만들어낸 ‘있으라’는 선언이 아니라, ‘나뉘라’는 명령형(יְהִי מַבְדִּיל, yehi mavdil)이 핵심입니다. 곧 혼합된 세계를 구분하여 질서를 세우는 하나님의 권능이 강조되는 날입니다.
“궁창”이란 표현은 히브리어 ‘라키아’(רָקִיעַ)로, 그 어원은 ‘펴다, 두드려 얇게 펼치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라카’(רָקַע)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늘을 단단한 돔처럼 상상했음을 반영합니다. ‘라키아’는 금속판처럼 두들겨서 펼쳐 놓은 ‘돔형의 창공’으로 이해되었으며, 시편 19:1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는 구절을 통해, 하늘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와 영광을 드러내는 실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궁창으로 ‘물과 물 사이를 나누셨다’고 하십니다. 궁창 아래의 물은 땅을 덮은 대양과 바다이며, 위의 물은 고대의 우주관에 따라 궁창 너머에 있는 초월적 물, 곧 하늘창고(욥기 38:22)나 창세기 7장에서 쏟아지는 홍수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신비로운 영역입니다. 이 물의 구분은 단순한 기상학적 설명이 아니라, 무질서한 혼돈(물)을 하나님의 질서 속에 두시는 행위입니다.
특이한 점은, 이 둘째 날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טוֹב, tov)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전통적인 유대 해석에서는 이 날의 창조가 미완성이며 셋째 날의 땅과 식물 창조와 함께 하나의 단위로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또 어떤 주석가들은 이 날은 ‘분리’와 ‘경계 설정’이라는 창조의 도중 과정이기 때문에, ‘선함’이라는 평가가 생략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창조의 모든 단계를 신중히 설계하시고, 철저히 질서를 세우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 궁창을 “하늘”(שָׁמַיִם, shamayim)이라 부르십니다. ‘샤마임’은 복수형으로, 문자 그대로는 ‘물들(waters)’과 관련된 어원을 가진 복합어로 여겨집니다. 이 이름 부여는 곧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선언입니다. 앞선 묵상에서도 보았듯,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소유와 통치의 신적 행위입니다. 인간은 그저 그것을 ‘보는 자’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이름 짓는 자’, 곧 통치자이십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첫째 날에 이어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진행됨을 보여줍니다. 유대 전통에서 하루는 어둠에서 시작되어 빛으로 나아가며, 이것은 구속사의 방향성, 곧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이행을 상징합니다. 둘째 날의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혼돈의 물이 분리되어 공간이 열리고, 생명이 거할 터전이 준비됩니다. 창조는 단지 사물의 출현이 아니라, 관계와 경계, 의미와 자리를 정해주는 작업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에 깊은 묵상을 안겨줍니다. 첫째, 하나님은 구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삶 속 혼합되고 경계 없는 감정, 관계, 욕망 속에서 하나님은 물과 물 사이를 나누듯, 정리하고 구분하시며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게 하십니다. 둘째, 하늘은 단순한 기후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의 표상입니다. 우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그 위에 펼쳐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의 점진적 확장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지만, 분리와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뜻은 한 걸음씩 구현됩니다.
우리의 인생도 지금 ‘둘째 날’일 수 있습니다. 아직은 ‘좋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들리지 않을지라도, 분명 하나님의 손은 우리를 향해 ‘공간’을 마련하고 계십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하늘이 펼쳐지고, 마침내 생명이 거할 땅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돈 가운데 있는 이 시간조차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은밀한 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 1:9-13 셋째 날의 창조
셋째 날은 둘째 날의 연장입니다. 이제는 아래의 물에서 물속에 잠긴 땅을 불러 내십니다. 물을 한 곳으로 부르시고, 육지를 만드십니다. 그 육지는 땅(에레츠)이라 부릅니다. 에레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줄 기업, 자손 대대로 물려 가야 할 소명의 장소입니다.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나무를 내게 하십니다.
창세기 1:9–13 묵상 | 셋째 날의 창조, 땅의 드러남과 생명의 발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창세기 1:9–13, 개역개정)
셋째 날의 창조는 이중적인 창조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혼돈의 물에서 땅이 드러나는 ‘지리적 창조’이며, 둘째, 그 땅 위에 생명이 자라나게 되는 ‘생물학적 창조’입니다. 이 날은 생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날이며, 창조의 무대가 완전히 준비되는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십니다. ‘모이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יִקָּווּ’ (yiqqāwû), 수동형 명령어로, ‘스스로 모여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지는 질서의 회복을 말합니다. 이 동사는 시편 104:6–9에서도 동일하게 쓰이며, 홍수 이후 하나님이 물의 경계를 정하신 창조의 지속성으로 확장됩니다. “드러나라”는 말은 ‘תֵּרָאֶה’ (tērā’eh), 즉 '드러나다, 나타나다'로서, 이미 존재하지만 감춰졌던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그 본래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 뭍을 ‘땅’(אֶרֶץ, ’erets), 물을 ‘바다’(יָם, yam)이라 부르십니다. 땅과 바다는 고대 근동에서 창조 신화 속 혼돈과 질서의 대립 구조 속에 있었던 주제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확히 선언합니다. 혼돈(물)은 하나님에 의해 제한되며, 땅은 생명의 터전으로 드러나도록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질서화됩니다. ‘이름 부르심’은 곧 통치권의 선언이며, 하나님은 바다조차 제어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이제 창조의 두 번째 명령이 이어집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각기 종류대로”(לְמִינֵהוּ, lemînēhû)입니다. 이는 셋째 날에만 세 번 반복되며, 하나님이 생명을 무질서하게가 아니라 유전적 질서와 다양성의 원리에 따라 창조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이후 모든 생물학의 기초가 되는 ‘종의 구분’이라는 원리를 성경 창조론의 핵심으로 세웁니다.
히브리어로 ‘풀’(דֶּשֶׁא, deshe’)은 단순한 식물의 총칭이 아니라, 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생명의 증표입니다. ‘씨 맺는 채소’(עֵשֶׂב מַזְרִיעַ זֶרַע, ‘esev mazrîa zera‘)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는 자가 복제와 생명의 연속성을 내포합니다. 씨(זֶרַע, zera‘)는 창세기 전체를 통해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발전합니다. 아브라함의 ‘씨’, 즉 후손과 언약의 개념은 이 식물적 창조의 기초에 깔린 생명의 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씨는 생명이며, 언약이며, 미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놀라운 점은 ‘땅이 그대로 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 속 깊은 곳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힘이 되었고, 그 말씀이 생명의 질서를 순종하게 했습니다. 이 땅은 단지 무생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반응하는 피조 세계입니다. 이 관점은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탄식한다”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죽은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는 생명력 있는 세계입니다.
셋째 날에 하나님은 두 번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십니다. 이는 첫째는 땅과 바다의 구분에 대한 평가이고, 둘째는 생명의 창조에 대한 평가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와 생명 모두를 선하다고 평가하십니다. 성 어거스틴은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는 선함 자체를 흘러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의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두 번의 ‘좋음’은 생명이 시작되는 날, 우리가 속한 세계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는 선언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이 반복은 여전히 창조의 일관성과 진전을 나타냅니다. 혼돈의 바다에서 땅이 드러나고, 그 위에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 흐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세계를 치밀하게 준비하시는 섭리의 시간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이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숨겨진 가능성의 땅을 드러내시며, 그 위에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 열매 맺는 생명의 질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열매 맺기 위해 어떤 땅 위에 놓여 있는가?
셋째 날은 우리에게 생명과 순종, 질서와 풍요,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생명을 일으키시며, 언약의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창세기 1:14-19 넷째 날의 창조
넷째 날은 첫째 날과 상응합니다. 첫째 날 빛을 만드신 것처럼 넷째 날은 둘째 날 만든 공간에 빛을 채우십니다. 궁창에 큰 광명체와 별들을 만드십니다. 낮과 어둠을 나눕니다.
창세기 1:14–19 묵상 | 넷째 날의 창조, 하늘의 광명과 시간의 질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별들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창세기 1:14–19, 개역개정)
넷째 날은 하늘에 광명체들이 세워지는 장면으로, 우주적 질서 속에서 시간과 계절, 주기와 리듬이 창조되는 날입니다. 셋째 날까지 준비된 세계의 무대 위에, 이제 시간의 조율자들이 등장하는 순간이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가 공간적 질서에서 시간적 질서로 확장되는 전환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광명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여기서 ‘광명’은 히브리어로 ‘מְאֹרֹת’ (me’orot)로, ‘빛을 내는 것들’, 또는 ‘광체(光體)’를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첫째 날 창조된 빛(‘오르’, ’ôr)와는 달리, 넷째 날의 광명은 빛을 담는 그릇 또는 빛의 기능을 조직하는 구조체입니다. 다시 말해, 첫째 날 창조된 ‘빛’은 존재론적인 근원이었고, 넷째 날은 그 빛을 분배하고 주관할 도구들이 창조된 것입니다.
이 광명들의 목적은 단순히 비추는 기능만이 아니라, “징조(אוֹת, ’ôt), 계절(מוֹעֲדִים, mo’adim), 날, 해”를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특히 ‘모아딤’은 성경에서 절기,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주신 거룩한 시간의 질서를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됩니다 (레위기 23장). 하나님의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흐름’이 아니라 거룩한 사건의 리듬, 곧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입니다. 창세기의 넷째 날은 시간의 창조가 곧 예배와 언약,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계획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두 큰 광명”(שְׁנֵי הַמְּאֹרֹת הַגְּדֹלִים, shenei hame’orot hagedolim)을 만드시며,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태양)**과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달)**을 구분하십니다. 여기서 ‘만드시다’는 동사 ‘עָשָׂה’(‘asah)는 ‘형성하다, 세우다’는 의미로 사용되며, 이는 존재의 창조(bara)와는 다르게 기능적 배치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물체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주적 역할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시고”라는 간단한 구절은, 고대 세계관에서는 매우 대담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의 여러 신화에서 별들은 신들이거나 신적 존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별들조차 하나님의 손에 지어진 피조물일 뿐이라고 담담히 말합니다. 이는 철저히 **유일신 사상(monotheism)**의 정수를 드러내며, 세상의 모든 운행과 주기, 별들의 운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며”라는 표현은, 그들이 단지 하늘에 떠 있는 장식이 아니라, 땅을 위한 기능적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과 생명의 삶을 위한 환경 창조이며, 광명체들은 생명과 예배의 시간을 가늠하게 하는 거룩한 시계입니다. 이것은 시편 104:19에서도 이렇게 표현됩니다: “그가 달을 만드사 절기를 정하시며 해는 그 지는 때를 알도다.”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여기서 ‘주관하다’(מֶמְשֶׁלֶת, memshelet)는 통치하다, 다스리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위임하신 질서적 권위가 드러납니다. 이는 장차 인간에게 주어질 ‘다스림’의 청지기적 모델이기도 합니다. 광명체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기능하는 피조된 통치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넷째 날 역시 하나님의 평가 속에 있습니다. 이 날은 단지 우주의 외형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역사, 계절과 리듬, 생명의 호흡을 맞추는 은총의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심미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의미와 목적의 구성을 포함한 전인적 선함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어둠에서 빛으로, 무의미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창조의 방향성이 계속됩니다. 시간의 흐름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맞춰 준비된 것입니다.
넷째 날의 묵상은 우리에게 깊은 신학적 통찰을 줍니다. 첫째,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창조 질서의 일부이며, 단순한 흐름이 아니라 거룩한 주기입니다. 둘째, 하늘의 광명은 예배의 리듬, 인간의 계절, 생명의 성장 주기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입니다. 셋째, 우주 만물은 우연한 구성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목적 속에 조직된 생명의 무대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루하루를 단지 흘러가는 시간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새겨진 시간, 하나님의 빛이 가늠하게 한 질서의 공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광명 아래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넷째 날’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광명 안에서 삶을 다시 세우는 날들 말입니다.
창세기 1:20-23 다섯째 날의 창조
다섯째 날은 궁창에 새를 창조하고, 아랫물인 바다에 물고기를 창조하십니다. 시간이 갈수록 공허한 것들이 채워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충만하고 번성하라 하십니다.
창세기 1:20–23 묵상 | 다섯째 날의 창조, 바다와 하늘의 생명 충만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이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게 하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것들에게 복을 주어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20–23, 개역개정)
다섯째 날은 생명의 본격적인 등장, 특히 움직이는 생명체의 창조가 이뤄지는 날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창조는 무생물적 공간에서 생명으로, 또 정적인 세계에서 역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들의 탄생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가 관찰할 수 있는 질서에서 관계 맺는 생명으로 확장되는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물이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יִשְׁרְצוּ הַמַּיִם שֶׁרֶץ נֶפֶשׁ חַיָּה”(yishretzu hammayim sherets nefesh chayyah)로, 직역하면 “물들이 살아 있는 생물의 떼를 끓게 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쉐레츠’(שֶׁרֶץ)는 ‘떼 지어 움직이는 작은 생명체’를 뜻하며, 곤충, 물고기, 갑각류 등 작은 동물들을 통칭합니다. ‘네페시 하야’(נֶפֶשׁ חַיָּה)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생명 있는 혼’**이라는 뜻으로, 창세기 2장에서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이로써 물속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도 하나님의 생기(생명의 호흡)를 품은 귀한 창조물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게 하라”는 말씀은 생명이 단지 한 공간에만 머무르지 않고, 하늘과 바다, 곧 수직적 공간 전체에 걸쳐 퍼지는 확장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하늘을 나는 새와 물에 사는 생물이 동시에 창조된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양극단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위와 아래, 깊음과 높음 모두에 생명의 질서를 부여하심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큰 바다 짐승들”(הַתַּנִּינִם הַגְּדֹלִים, hattannīnīm haggədōlīm)을 창조하십니다. 여기서 ‘탄닌’(תַּנִּין)은 고대 근동에서 흔히 혼돈과 관련된 신화적 해룡을 가리키는 단어였지만, 성경은 이를 창조주 하나님께 복속된 존재로 재정의합니다. 이들은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 위에 아무런 두려움이나 경쟁도 없이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로 계심을 분명히 합니다. 이것은 고대의 신화들을 넘어서는 성경적 유일신론(monotheism)의 선언이자 승리입니다.
이어지는 표현에서 “각기 종류대로”라는 구절이 반복됩니다. 이 구절은 창조된 생명들이 무작위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유전적 정체성과 질서를 가진 독립적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생물 다양성과 종 보존의 가치를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신학적 근거가 되며, 하나님께서 질서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의도적으로 만드셨음을 증언합니다.
이 날의 창조는 특별한 복과 함께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은 생물들을 향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복’(בָּרַךְ, barakh)은 성경에 처음으로 사용되는 축복의 동사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지지와 번성을 위한 은혜의 선언입니다. 이는 단순한 기능적 명령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과 인격적 돌보심이 담긴 말씀입니다. 이 복은 후에 인간 창조 때도 동일하게 주어지며, 하나님의 생명론적 공동체 속에서의 번성과 확장을 위한 본질적인 축복 구조로 자리잡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다섯째 날은 이제 움직이는 생명체들이 창조 세계에 생기와 소리를 더한 날입니다. 고요하고 질서정연했던 우주는 이제 생명의 활동, 번식, 울림, 물결, 날갯짓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영적 교훈을 줍니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는 공간적 확장과 생명의 다양성을 기뻐하시는 창조의 신학입니다. 인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다의 깊은 곳에 있는 미세한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존재하는 가치 있는 생명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생명이 단지 기능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받은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임을 이 말씀은 분명히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창조는 충만으로 나아갑니다. 바다와 하늘, 보이지 않는 곳까지도 하나님의 생명이 가득 차도록 계획하셨듯이, 우리의 삶 속 빈 영역들도 하나님은 그분의 생명으로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섯째 날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제 삶의 바다와 하늘에도 주님의 생명과 복을 채워주소서.
저의 존재가 주님의 뜻대로 충만하게 번성하며, 모든 날개 짓과 물결 소리마다
주님의 창조의 기쁨을 노래하게 하소서.”
창세기 1:24-31 여섯째 날의 창조
여섯째 날은 땅에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사람을 창조할 때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의논하며 자신의 형상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창세기 1:24–31 묵상 | 여섯째 날의 창조, 땅 위의 생명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24–31, 개역개정)
여섯째 날은 창조의 절정이자 가장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생명의 풍성함이 땅 위에 완성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이 창조되는 날입니다. 이 날은 단지 ‘하루’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창조 목적의 완성 선언이며, 인간 존재의 근원적 정체성을 명확히 밝히는 사건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십니다. 이는 다섯째 날과 유사하지만, 이제는 땅 위를 기는 생물들이 등장합니다. ‘가축’(בְּהֵמָה, behemah), ‘땅의 짐승’(חַיַּת הָאָרֶץ, chayyat ha’aretz), ‘기는 것’(רֶמֶשׂ, remes)의 세 구분은 인간과 가까이 있는 짐승들, 야생동물, 작고 기는 생물들로, 하나님께서 육지 생태계 전체를 포괄적으로 계획하셨음을 보여줍니다.
“그 종류대로”라는 표현은 계속 반복됩니다. 이는 창조가 무질서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구분과 다양성, 질서 안에서 생명의 풍요로움이 실현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들조차 **그 자체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러나 진정한 창조의 절정은 이제부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이 구절은 창세기의 절정 중 절정이며, 성경 전편에서 인간 존재의 위치를 결정짓는 가장 근본적인 선언입니다. 히브리어로 ‘형상’은 ‘첼렘’(צֶלֶם), ‘모양’은 ‘데무트’(דְּמוּת)로, 단순한 외형이 아닌 기능적이고 관계적인 유사성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처럼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사명을 대리 수행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이 문장은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 고대 유대 전통은 이를 하늘 회중 또는 하나님의 천상 의회로 보았고, 기독교 전통은 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대화로 해석해 왔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여기서 하나님 내의 복합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인간의 존재가 관계적 존재임을 내포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세 가지 핵심 사명을 주십니다.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이는 인간이 생명을 창출하고 사회를 구성할 책임.
- 땅을 정복하라(כָּבַשׁ, kavash)—단순히 지배가 아닌, 질서를 부여하고 돌보며 활용하라는 위임 통치의 언어.
- 다스리라(רָדָה, radah)—전제군주의 압제가 아닌, 청지기적 돌봄과 관리를 의미하는 ‘하나님 닮은 다스림’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구절은 젠더의 차이와 상호 보완성, 인간 존재의 풍성함과 관계성을 동시에 내포합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며, 이는 성경이 여성에 대한 낮은 시각을 가진 고대 문명과 확연히 구별되는 대목입니다.
그 후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셨다”—이것은 생명체 중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축복으로, 존재의 가치와 존재의 사명 모두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먹거리로 주시며, 생명체 전체에도 “푸른 풀”을 주십니다. 이는 초기 창조세계가 조화와 평화의 생태계, 곧 인간과 동물 모두가 ‘살인’ 없이 공존하는 상태였음을 보여줍니다. 이 평화의 비전은 이사야 11장에서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눕는 종말의 회복 비전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טוֹב מְאֹד, tov me’od)”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반복되던 “좋았더라”라는 평가가 이 날에 와서 처음으로 “심히(매우) 좋았다”로 절정에 도달합니다. 창조의 완성은 인간의 창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은 피조물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상과 관계 맺고, 생명을 돌보며, 하나님의 뜻을 대리하는 존재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이 표현은 여섯 날 중 마지막 낮의 경계를 알리는 동시에, 인간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목적이 깃들어 있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인간의 하루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복을 받고, 사명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이 여섯째 날의 묵상은 오늘 우리의 정체성과 소명을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하나님의 형상이며, 관계적 존재이고, 창조 질서의 청지기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생명을 낳고, 세상을 돌보며,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반영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하나님의 복 속에서, 생명과 화평을 이루는 길로.
이제 우리는 그 창조의 아름다움과 정체성의 복 안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의 형상답게 살게 하소서.
저의 말과 선택과 관계 속에 창조주의 뜻이 비치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이 ‘심히 좋았더라’ 하셨던 그 창조의 품격을,
제 삶을 통해 다시 회복하게 하소서.”